2008년 03월 29일
戰鬪美少女の精神分析
戰鬪美少女の精神分析
斎藤環
2006
ちくま文庫

왜 일본에서는 그토록 많은 전투미소녀를 다룬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존재할까? 그것도 아마조네스와 같은 강력한 여성들이 아니라, 눈망울은 커다랗고, 몸이 가련할 정도로 여윈 소녀들이 몸에 갑옷을 두르고 자신의 몸보다 큰 총을 들고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일까?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오타쿠론이다. 과연 오타쿠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오타쿠론은 “오타쿠학 입문”에서와 같은 자생적인 오타쿠들의 자기성찰에서 비롯된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인문학적 영역에서의 맥락하에 오타쿠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들과 이어진다. 가령 오츠카 에이지가 주장하는 ‘허구적 대서사론’은 대서사의 붕괴 이후 그 ‘중심의 부재’를 허구적 이야기로 메우려는 시도를 오타쿠의 발생으로 이해하고 있고(“그녀들의 연합적군”, “오타쿠의 정신사” 등에서 이런 논의가 잘 정리되어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DB 소비론’을 통해 실존적 근거의 부재 상황에서 주어진 DB의 조합을 통해 소비 경험을 쌓아가는 행위 속에서 오타쿠의 모습을 발견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 2)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사이토 타마키의 ‘오타쿠’에 대한 접근이 가장 정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이토의 기본적 논의는 라캉에 있어서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문제에 있어 상징계적 질서에 편입됨으로써 자신의 지속적 유지를 보장받는 상상계가 자립화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일종의 오타쿠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오타쿠는 흔히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듯,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는 것이 아니라(여기서 현실은 상상계를 복속시킴으로써 주체를 생산하는 상징계적 질서의 의미라고 한다면), 오히려 상상계적 권위가 승인되지 않는 복수의 ‘현실’을 오가는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오타쿠의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전투미소녀’에 대한 사이토 타마키의 논의의 핵심적 지점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선 그를 매개하는 존재로서 헨리 더거(Henry Darger)가 있다. 헨리 더거는 우연히 발견된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망으로 시설에서 키워졌던 그는 시설을 나온 후 혼자서 60여년간을 병원 잡역부로 일하면서 고독하게 살아갔던 인물이다. 그가 병으로 쓰러져 시설에 옮겨간 사이 집주인은 그의 방에 모아 놓은 놀랄만한 양의 잡동사니에 경악하게 된다. 하지만 그 잡동사니 속에서 나온 16권에 달하는 가제본 책에는 헨리가 평생 써왔던 환타지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그의 삽화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비현실의 왕국에서”라는 이 환타지는 미국 남북전쟁을 연상시키는 세계 속에서 악을 상징하는 어른들과, 기독교를 상징하는 아이들의 세계로 나뉘어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서 ‘비비안 걸스’라고 불리는 소녀들은 아이들의 세계의 구원자로서 어른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는 놀랄 만큼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이 전쟁을 그리고 있고, 그 과정에 어른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아이들과 고문당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이토 타마키는 이런 헨리 더거의 삶과 그가 그려낸, 더 정확하게는 그와 함께 살아 있던 이런 이미지의 세계가 일본의 전투미소녀에 대한 애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살펴본다. 우선 그는 정신과 의사답게 헨리 더거가 앓았을 정신병력에 대해 살펴본다. 그는 정신분열에서 편집증까지의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한 후, 그의 작품 세계가 보여주는 특질로부터 직관상자질자(直觀像資質者)라는 진단을 내려본다. ‘직관상자질’은 어린 시절 풍부했다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는 능력으로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더 생생하게 경험하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대개는 사회화를 통해서 이런 능력을 약화되게 되는데, 더거의 경우에는 이것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타마키는 상상계적 경험이 상징계적 질서로 통합되지 않고, 자립적 상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더거와 오타쿠 사이의 접점이 발생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만 더거가 자신만의 세계에 은둔하면서,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상상계를 만들어갔다면, 오타쿠는 오히려 이런 자신의 상상계들을 연기처럼 표현하고, 또한 비평적 시각으로 오가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다. (그런 점에서 더거는 오타쿠보다는 히키코모리에 가깝겠지만)
두 번째 커다란 주제는 이처럼 상징계에 복속하지 않는 상상계들을 오가는 오타쿠에 있어서의 섹슈얼리티의 위치에 대한 문제다. 사실 전자에 오타쿠에 대한 논리적 해명 부분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꽤나 정치한 문제다. 그런데 이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그런 정치성보다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핵심적 주장은 이것이다. 과잉된 미디어의 시대는 결과적으로 비대한 상상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상징계적 질서에 의한 주체로서의 정립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세상의 비극들을 보여주면서 절망하던 TV 프로그램은, 한 순간 수 십명의 기아를 해결할 음식을 장난거리로 만들면서 낄낄댄다. 이런 휘발적인 미디어의 성격은 결국 상징계가 지니는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런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현실이라는 시뮬라크르는 주체를 내파시킨다. (사실 이 부분에서 오츠카 에이지가 지적한 대서사의 붕괴에 의한 불안함이 연결되는 맥락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과잉 미디어 사회가 가져오는 주체의 내파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타마키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다가갈 수 없는 현실계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섹슈얼리티다. 이 부분의 구체적인 논점들은 책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고, 핵심을 간단하게만 살펴본다면, 욕망의 기점으로서의 외상과 이 외상으로부터 비롯되는 섹슈얼리티의 정립이라는 문제에서, 내파된 과잉 미디어의 사회는 결국 주체들에 있어 이런 외상의 존재 역시도 이미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타쿠는 ‘전투미소녀’라는 존재를 통해 허구적 외상을 창조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상상계 속에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오타쿠가 과잉 미디어에 대응하는 주체의 전략이라고 타마키는 주장한다. 푸코의 논지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고 여겨지는 이런 주장은(물론 책에는 전혀 푸코가 거론되지는 않지만), 오타쿠를 일종의 과잉 미디어 사회에 대응하는 주체적 전략의 결과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오타쿠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맥락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타마키 스스로도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오타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그들이 가지는 위치를 재검토하면서 결국 옹호론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런 그의 논의가 적절한지의 여부는 전투미소녀를 ‘Phallus Girl’로 규정하는 그의 입장이 적절한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이 부분은 그가 ‘일본적 공간’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사회 규정(이런 점에서 무라카미 타카시의 ‘Super Flat’이라 부르는 영역까지 이어지겠지만)과 그 과정에서 일본의 망가가 발전시킨 독특한 감수성의 세계에 대한 이해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근 상실의 트라우마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이끌어 내고, 이 과정에서 이런 트라우마를 실체화시키는 운동으로서의 히스테리에 대한 이해와 남근을 가진 소녀라는 모순적 주장을 통해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는 ‘여성화되지 않은’ 여성의 존재를, 그래서 실체적 외상이 없는 존재를 상정하는 오타쿠의 전략의 문제가 적절하냐의 문제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비록 오타쿠의 정의로부터 오타쿠를 현대 사회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대응의 한 전략으로 이해하는 사이의 갭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부분을 꼼꼼하게 밝혀냈다는 점에서 사이토 타마키의 작업은 최근 본 다른 일본 소장 문화연구자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아즈마 히로키의 톡톡 튀는 재기가 마음에 들다가도, 어떤 미묘한 가벼움이 답답했다면, 타마키의 꼼꼼하면서도 정치한 그래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연구 작업은 이런 답답함을 씻어주는 느낌이다. 이것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담론들이 수용되는 부분에 대한 고민과도 이어지는데, 국내에서 수많은 담론들이 오직 담론의 가장 상위에서만 이야기될 뿐(그런데 여기에 정오가 있을 수 있나?), 구체적인 지점까지 나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예전에 백승국이 쓴 기호학적 관점에서의 문화 분석서를 보면서 ‘이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 학자인가’하며 경악했던 건 공허한 담론의 반복 때문이었다. 어떤 구체성도 그 사람 앞에선 담론을 이야기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다. 플라톤적 현실이랄까? 그런데 문제는 국내에서의 담론 수용이 대부분 이런 상황이며 다른 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의 소장 문화 연구자들의 경우 담론 자체들을 보면 뭔가 이상하거나, 조금 잘못 이해한 것 아닌가 싶다. 타마키의 라깡 이해도 조금 그렇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는 풍부한 현실과 구체성이 있다. 레닌이 즐겨 말했던 괴테의 말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 뿐이다”는 지금도 유효하다.
또 하나는 개인적인 경험에서의 문제다. 사실 처음 게임에 대한 책을 썼을 때, 나를 지배했던 건 ‘과잉된 담론의 무게’에 짓눌리는 한국적 상황에 대한 고민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과잉 상징계의 시대’ 였다고나 할까? 그런 나에게 게임은 상징계의 무게를 줄이고, 주체로 하여금 상징계에 의한 과잉 포획을 피할 수 있는 분열증적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복수의 상상계적 공간이 가져오는 일종의 횡단적 자유 말이다. 반면 타마키가 고민하는 건 과잉된 미디어의 포획에 의하여 상징계적 질서가 휘발적이 되는 상황에서 주체의 내파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고민이었고, 이 과정에서 그렇게 미디어가 제공하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욕망 기제로 사용하는 것, 스스로의 욕망을 허구적 공간에 위치시키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을 고민한다.
레닌은 “일본 전진, 이보 후퇴”에서 멘셰비키들이 ‘무릎 꿇고 반항하기’를 즐겨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실 게임이라는 분열증적 공간으로의 도피는 레닌 말 그대로의 ‘무릎 꿇고 반항하기’인 셈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본에서도 똑같이 무릎 꿇고 반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긴 하다…^^ 다만 ‘과잉된 상징계의 사회’와 ‘과잉 미디어 사회’라는 극과 극의 대립이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이토 타마키의 이론적 전거는 그가 쓴 “문맥론”이라는 책에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좀 더 책을 찾아 봐야 할 인물로 느껴진다.
p.s. 국내에서도 타마키의 책이 번역되어 있다.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인데, 책 소개에선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의 히키코모리 연구서들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긴 한데. 그런데 타마키의 책은 꽤 빡빡하다. 일단 기본적으로 라캉과 지젝의 논의가 전제로 등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이해 없이는 쉽게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책 제목을 저렇게 뽑았으니 가볍게 접근했던 사람들은 크게 낭패를 보지 않을까 우려된다.
# by | 2008/03/29 23:43 | 대중 문화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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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대중 문화 연구에서 새로운 단계를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책을 이 책의 자매편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더 자세한 책의 내용은 http://eledition.egloos.com/1563938 Leave a Reply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page About GameStudy.org ... more
(그런데 이건 비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