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 波狀言論S改

-社會學·メタゲ-ム·自由

東浩紀

2005

靑土社; 東京

 

일본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아즈마 히로키가자신이 냈던 메일 매거진 波狀言論에서 했던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들과의 대담을모아 놓은 모음집이다. 여기서는 최근 일본에서 주목 받는 사회학자 세 명과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논의의 중심 주제는 결국 사회속에서 주체의 문제를 정치적 틀을통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되고 있다. 그래서 리버럴리즘과Libertarianism이라는 중심적 대립을 축으로 그리고 다시 사회의 성격에 있어 포스트모던이 차지하는 의미란 무엇인지에 대해집중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유의 문제를 다시 짚어보며,어떤 대안을 끌어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이론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b>민족주의와 천황제라는 숭고함을 찾아서</b>

 

가장 먼저 대담을 한 사회학자는 미야다이 신지(宮台) “계산불가능성을 설계한다는 글에서 살펴보았던 그 사회학자다. 원조교제에 대한 독특한 관점의 연구와 음악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높은 인지도를 얻고 그 후에도 오움교에 대한 일본인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최근 민족주의와 천황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함으로써 많은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이번 대담을 통해서는 그의 이런 사고의 전향이라 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해서집중적으로 이야기되었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루만의 사회 시스템 이론과 로티의 아이러니를 통한 정치학이다. 이 두 가지 이론이 다 잠재적으로 우익적 해석을가능하게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이런 입장 전환은 일본에서도 꽤 논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긴 대담을 전부 다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그의 핵심적 태도는 이렇게 읽힌다.우선 그가 최초 원조교제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그는 원조교제하는 아이들에게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심화에 의해 일어나는 점점 더 빨라지는 자본의 순환의 고리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거주처를 잃게된다는 고전적인 이해에서, 과연 주체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뎌낼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짚고 있다. 여기서 일종의 의도적분열증을 그는 발견하게 된다. 즉 원조교제를 통해 자본의 빠른 순환에 몸을 맡기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미시적 삶에 뿌리를 둔다는 분열 말이다. 그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몸을 욕망하는 자본주의에 그 몸을 맞춰 던져버리고, 대신 영혼의 안식을 얻는다는것이다. 여기서 그는 일종의 로티적인 아이러니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즉 사적인 영역에서의 가치와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태도를 분리하는 영역이다.

 

문제는 그렇게 문제를 바라보던 그가 최근 들어 급격하게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분열증이 다시 통합이 된 것이다. 이 통합은 현실적으로자본의 순환에 모든 것을 떠 맡긴 후,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빠져버리게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아즈마 히로키가 오랫동안 이야기했던 동물화하는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은 사는 것도 살지 않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무능력, 삶에 어떤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를 안타까워하면서미야다이가 내놓은 대안은 그들이 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감동, 혹은 숭고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이 다시 민족주의며, 천황제인셈이다. 그 이전까지의 천황제가 기존 질서의 유지에 대한 요구였다면,지금 다시 미야다이가 말하는 천황제는 이런 새로운 숭고함을 위한 밑으로부터의 추대를 통한 천황제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대담이 가치 있는 것은 이런 포멀한 미야다이의 주장 곳곳에서 삶에 지친 실천가, 혹은 활동가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다양한롤 플레이를 하는 활동가로 자리매김하면서 감히라는 표현을사용하면서 도발적인 주장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일종의 전향에 대해서 아즈마 히로키는 계속강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과연 그의 비판이 미야다이의 지쳐있는 모습을 대신해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않는다.

 

<b> 자유를 생각한다 </b>

 

미야다이보다 한 세대 젊은 사회학자 키타다 아키히로(北田曉大)와의 대담은 미야다이와의 대담보다는 훨씬 활력이 있다. 미야다이의전향이 일종의 지쳐버림에서 나온 어떤 것이라면, 키타다는 적극적인 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방향에 있어 같은 나이인 아즈마와 겹치면서 더 깊은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일본의 학문적 상황에대한 논의들, 사회학에서 메타 이론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실증적연구 혹은 문화연구론이 지니는 한계들에 대한 논의들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보는 과정이 진행된다.

 

본격적인 논의는 자유의문제. 가장 큰 대립의 축은 역시 리버럴리즘과 리버타리아니즘의 문제였다. 특히 아즈마가 말하는 새로운 형태의 환경통제의 사회에서 리버타리아니즘은 일종의 시대 정신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다. 이것은 이어지는 대담에서도 계속되는 주제지만, 아즈마가 말하는 일종의이중적 구조, 즉 사회의 기반이 되는 일종의 OS에 해당하는틀을 만들고, 이것은 개별 당파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회 작동의 기제다라고 선언하는 상황. 다시 말해 데이터베이스의 구조가 존재하게 되고, 이 위에서 개별당파의 이해는 다양한 형태로 조정될 수 있다는 리버타리아니즘의 발상은 그 도구적 유효성 때문에 결국 좌, 우파모두에게 사용 가능한 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연 자유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가 문제가된다.

 

특히 이 정의의 문제에서 아즈마나 키타다가 고민하는 건 포스트모던시대의 재귀적 주체성의 문제다. 주체가자신을 규정하는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얻어진 결과에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이런 과정 자체가 결과적으로 자유의 틀을 선규정함으로써 자유를 불가능하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즈마나 키타다가 고민하는 그 프레임워크 자체를 거부할 자유의 문제가 이야기된다. 그러나 문제는 리버타리아니즘이 지니는 놀라운 설득력. 결국 룰을인정하는 한에서 이해를 조정하자는 이들의 이중적 구조의 담론을 넘어설 대안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문제다.여기서 아즈마와 데리다적인 절대적 타자에 대한 승인을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리고 키타다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자유를 구축할 것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실천론으로 이어지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b> 상상력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b>

 

마지막 대담자는 오오자와 마사치(大澤) 미야타이와 동년배이고 초기에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그 역시 앞의 논자와 마찬가지로 리버타리아니즘의일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아즈마가 이런 리버타리아니즘이 이미 진행되어 있는 포스트 모던한상황, 즉 동물화한 사회의 이론적 반영이라고 보는 반면, 오오자와는이런 구도가 아직 충분히 실현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유보를 보이고 있다. 이점에서는 기술 변화, 가치 중립적인 외양을 통해서 토대를 규정하는 이 기술에 민감한 아즈마가 상대적으로 그 기술적 완성 형태에 민감한것은 당연하지 싶다.

 

이 대담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미야타이와 같은 전향이 아니고,아니면 기존 아사다 아키라 류의 논자들이 결국 도달한 건강한 시민사회의 구축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모델이 아니라면 어떤 길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기본적으로 아즈마는 토대가 되는 영역, 즉 데이터베이스의 부분에대한 기술적 개입을 고려하는 것으로 생각되고(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오오자와는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사람들에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b> 대안 부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b>

 

이 대담에 참여한 세 명의 사회학자들,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 함께 참여한 젊은 사회학자인 스즈키 겐스케는 시기로 보면 크게 세 세대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인 면에서 아마도 가장 공감이 가는 건비슷한 이론적 궤적을 겪었던 미야타이와 오오자와가 아닌가 싶다. 특히 그 중에서 오오자와의 이야기는많은 부분 공감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가 있을 때 그것에 동의하던,동의하지 않던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축을 제공해주었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도태라는상황과 함께, 마르크스주의가그 대안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린 후, 사회는 미시화 혹은 세분화의 길로 흩어져버리게 되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건 미시적 이해기에 거기에는 거시적인 사회의 문제나 대안적 틀은 제기되지 않는다. 결국 궤적이 없는 미시적 싸움들만이 우연적이고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인 셈이다. 여기서 차근차근 아즈마가 생각하는 동물화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이동물화하는 사회의 기단에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에 의한 통제가 구축이 된다. 이것은 가치중립적인 외양을지니지만 그 자체가 현재의 사회의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리고 다시 이 사회 외부에서이질적인 것이 들어올 가능성을 봉쇄하는 근원적 구조로 작동한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맞서서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 대담은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고민들인 셈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아마도 한국은 복 받은 사회일것이다. 이명박과 지배 계급은 놀라울 정도로 나이브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고, 국민을 억압한다. 그리고 그 이익을 얻기 위해서 건드려서는 안될법과 공권력을 기꺼이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룰에 대한 동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가진 자의 편이고, 공권력은 그들의 이해를 위해 기꺼이 불법적인 폭력을 국민에게 행사한다. 리버타리아니즘이 꿈꾸는 중립적 프레임 워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한국을 더욱 강력하게 정치화하고 고민하고행동하게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런데 삶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마르크스주의 이후 삶의 가치는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자본의 강력한 순환의 틀에서, 그놀라운 속도 속에서 삶은 어떻게 지켜지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의제화하지 못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패배의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물론그 점에서는 나 역시 마찬가지이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야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세계가 다음 단계의 가능성을 찾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by Elvira | 2008/06/30 00:47 | 대중 문화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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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미뎌 at 2008/06/30 17:4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기님 글은 원래 저에게는 넘 어려워서 ㅠㅠ 완벽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문단의 내용은 제가 요새 고민하고 있는 부분과 맞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Elvira at 2008/07/01 15:18
ㅠ.ㅠ 밀도가 원체 높은 대담집 형식이라서 제가 잘 정리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뵌 지 오래되었는데 조만간 뵙고서 이야기 많이 나눠야지요..^^
Commented by 미뎌 at 2008/08/01 11:00
교욱감 선거가 지나고 다시 보니 참 명문이네요. mb정권의 나이브한 지배가 오히려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면에서 보면 복받은 사회가 맞는 거 같습니다.

진짜 언제 뵈야죠^^ 특히 준비하신다는 스터디에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Elvira at 2008/08/04 00:46
예^^ 연구회에 세미나 일정 올렸습니다. 세미나를 시작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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